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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난도 오르티스의 통문화론과 탈식민주의 / 우석균 2004-01-27 / 4388   

페르난도 오르티스의 통문화론과 탈식민주의

우 석 균



1. 들어가면서


문화연구가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되어 가는 요즈음 통문화론은 라틴아메리카 문화 현상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패러다임의 하나로 주목을 받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통문화론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82년 우루과이의 문학 비평가 앙헬 라마가 『라틴아메리카의 서사적 통문화화』를 출간한 다음부터이다. 앙헬 라마는 ‘통문화화’라는 용어와 개념을 쿠바의 페르난도 오르티스(1881-1969)에게서 차용, 변형시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오르티스는 1940년 출간된 『담배와 설탕의 쿠바적 대위법』에서 처음으로 ‘통문화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오르티스는 유럽 문화와 -물론 주로 스페인 문화- 아프리카 문화가 만나 상호 동화작용과 상호 반작용을 겪은 후에 탄생한 것이 쿠바 문화라고 규정짓는다. 그리고 나아가 라틴아메리카 문화 전체를 통문화 개념에 의거해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통문화론은 오늘날처럼 문화연구가 본격화되기 훨씬 전에 제기되었다는 선구자적 가치도 있지만 현재성이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 현재성 중의 하나는 탈식민주의적 독해가 가능하다는 점에 기인한다.

본고는 주로 페르난도 오르티스의 『담배와 설탕의 쿠바적 대위법』을 중심으로 통문화론에 대해 고찰하고 간단이나마 탈식민주의적 독해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더듬어보고자 한다. 오르티스에 대해서는 국내 연구가 거의 없기 때문에 2장에서는 그의 간단한 삶과 학문적 궤적을 소개하겠다. 이 글의 사실상 본론이 될 3장에서는 통문화론에 대해서 살펴보고, 『담배와 설탕의 쿠바적 대위법』이 비교 분석에 의거하면서도 이분법적 대립을 스스로 해체하고 여러 문화가 뒤섞이는 현상을 부각시키는 과정을 추적할 것이다. 마지막 4장에서는 통문화론과 탈식민주의의 관계를 살펴보고 통문화론이 최근의 탈식민주의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더듬어볼 것이다.


2. 혼종의 학문적 궤적

오르티스는 1881년 아바나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한 살 때 아버지의 고국 스페인 메노르카로 가서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다시 아바나에 돌아온 것은 쿠바 독립전쟁이 시작된 1895년으로 아바나 대학에 입학하여 독립전쟁이 끝나던 해인 1898년까지 법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다시 스페인으로 건너가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 각각 법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1902년 귀국한다. 얼마 후 오르티스는 외무부에 들어가 스페인에 파견되었다가 이내 제노바 영사로 발령을 받아 이탈리아에 부임한다. 오르티스는 이탈리아에서 그에게 심대한 학문적 영향을 끼친 롬브로소(Cesare Lombroso)와 페라리(Enrico Ferrari)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형법 박사학위를 받은 오르티스가 학문적 지평을 범죄학과 실증주의로 넓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오르티스가 쿠바로 귀국한 뒤 집필한 책으로 학문적 업적을 최초로 인정받은 『흑인 주술사』(Los negros brujos, 1906)에는 그런 흔적이 역력하다. 롬브로소가 서문을 쓴 이 책은 실증주의식의 인종주의적 결정론 시각에서 쓴 일종의 범죄인류학 저서로 흑인 주술사들의 주술행위가 범죄의 온상이 되고 쿠바의 후진성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이 시기의 오르티스는 중심부에서 생산된 제국주의적 담론과 인종에 대한 편견을 철저히 답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인종주의적 결정론 시각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라틴아메리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오르티스의 경우 철학보다는 법학을 통해 실증주의를 받아들였다는 점이 특이할 뿐이다.

그러나 이후 오르티스는 차츰 서구에 대한 정신적 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시작한다. 신생독립국인 조국 쿠바의 당면과제인 국민국가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부터이다. 오르티스는 1916년에서 1926년 사이 자유당 소속으로 국회활동을 했으며, 마차도 독재정권에 대한 반정부 활동으로 1930년에는 망명을 떠나는 시련을 겪었고, 잠시 민주주의를 회복한 1933년 라몬 그라우 산 마르틴(Ramón Grau San Martín) 정권 시절에는 사회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진정한 국가적 통합을 위한 야심찬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했다. 오르티스의 대표적인 저작인 『담배와 설탕의 쿠바적 대위법』(1940)은 이런 이데올로기적 변신을 가장 잘 대변하는 에세이이다. 서구 문화와 아프리카 문화가 통문화 현상을 겪으며 새로운 문화를 창출했다는 점을 예찬하고, 이런 쿠바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오르티스에게서 『흑인 주술사』를 쓸 무렵의 제국의 공모자로서의 면모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오르티스에게서 실증주의적인 학문 연구방법론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가령, 『담배와 설탕의 쿠바적 대위법』은 담배와 설탕에 대한 이분법적 대비를 통해 대상을 파악하는 서구 근대의 학문체계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또한 담배와 설탕의 기원에서부터 생산과정, 생산방식, 노동형태,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영향, 소비행태, 세계체제 하에서의 전파과정 및 역할, 기호의 변화와의 연관성 등등을 정밀하게 추적하는 태도는 전형적인 실증주의적 연구방법론이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서구의 학문연구 방법론에 철두철미했다는 점이 오히려 오르티스의 독창성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독창성은 로만 델 라 캄파가 “전기적, 참고서지의 이종혼형성”(heterogeneidad bio-bibliografica)이라고 부를 정도로 모든 것을 뒤섞어버린다는 데 있다. 그야말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수많은 학문 영역을 넘나들었다. 오르티스의 수많은 저술의 연구대상만 놓고 보아도 주술이나 산테리아(Santería) 같은 컬트 신앙에서부터 정치나 사회, 또는 담배와 설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마치 세상만물을 똑같은 앎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마치 인간의 이성으로 세계의 질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백과사전이라는 ‘근대적 바이블’을 통해 계몽의 빛을 전파하리라는 백과전서파적 사명감을 연상시킨다. 백과사전의 각 항목이 우주의 질서를 파악하는데 저마다 일정부분 기여하듯이, 오르티스는 각 연구대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 쿠바 현실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였다. 연구대상을 단순 취합하는 것만으로 쿠바 현실을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는 아니었다. 오르티스는 『담배와 설탕의 대위법』 서두에서 “쿠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은 담배와 설탕이다”(El tabaco y el azúcar son los personajes más importantes de la historia de Cuba)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담배와 설탕을 연구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와 연관시킨다면 능히 쿠바의 역사를 꿰뚫어볼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정치적 격변이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주목하는 거시적 역사연구 방법이 아니라 미시적인 접근을 통해서도 거시적인 통찰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아날학파의 연구방법론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오르티스는 연구대상만 다변화시킨 것이 아니었다. 다양한 학문 영역을 넘나들며 학제간 연구와 유사한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범죄학이나 실증주의 외에도 인류학, 언어학, 형법, 범죄학, 심령학, 심리학, 문학 비평과 창작, 민속, 음악 등 다방면에 걸쳐 관심을 가졌으며, 이와 관련된 저술을 남겼다. 또한 마르크스나 뒤르켐, 파리를 중심으로 한 아방가르드 운동과 쿠바의 아방가르드 잡지 『전진』(Avnace)의 활동, 슈펭글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현실정치에도 관심이 많아 소비에트 혁명이나 파시즘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담배와 설탕의 쿠바적 대위법』만 놓고 보아도 오르티스가 얼마나 다채로운 영역을 넘나들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오르티스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문화접변론에 대한 대항 개념을 정립하려는 목적에서 썼다. 책의 서문에서 그와의 지적 교류를 언급하는 말리노프스키는 인류학 분야에서 문화의 본질적이고 정태적인 측면보다 관계, 작용, 발생, 변동 등의 동적인 측면을 중시한 기능주의(funcionalismo) 학파를 개척한 사람이다. 이런 점들은 오르티스가 당대 인류학의 흐름에 조예가 깊었다는 반증이다. 또한 『담배와 설탕의 쿠바적 대위법』은 마르크스나 뒤르켐의 연구방법론을 문화연구와 접목시키려한 시도이기도 하다. 물론 오르티스가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게 된 것은 당시의 학풍 탓일 것이다. 분과학문적 체계에 기초한 오늘날의 학풍과는 달리 당시에는 폭넓은 인문적 소양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르티스처럼 극히 이질적인 성격의 학문들까지 두루 섭렵한 예는 당시로서도 드물었다. 비슷한 시기에 문화서를 쓴 페드로 엔리케스 우레냐(Pedro Henríquez Ureña)나 마리아노 피콘 살라스(Mariano Picón Salas) 등이 인문학적 방법론에만 국한된 문화연구에 그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르티스는 분명 이질적인 방법론을 문화연구에 도입한 셈이다.

오르티스는 그러면서도 그 어떠한 연구방법론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으려 했다. 『흑인 주술사』에서 『담배와 설탕의 쿠바적 대위법』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분법적이고 실증주의적이며 백과전서파적인 연구방법은 유지하면서 제국주의적인 시각은 배제하려고 애썼다는 점이 좋은 예이다. 『담배와 설탕의 쿠바적 대위법』에서 마르크스나 뒤르켐의 연구방법론을 염두에 두게 된 것도 연구대상에 다각도로 접근하기 위한 것이었지 결코 그들의 연구 방법을 전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결국 너무도 계몽주의적 사명감이 투철하여 특정 연구방법론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연구방법론을 뒤섞는 태도가 서구 사상으로부터의 자유를 낳은 셈이며, 쿠바 현실에 맞는 통문화라는 범주를 설정할 수 있었던 독창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독창성 덕분에 오늘날 통문화 이론이 다시 복원되고, 문화연구가 오늘날처럼 하나의 분과학문으로 자리 잡기 이전에도 『담배와 설탕의 쿠바적 대위법』가 미국 여러 대학의 수업에서 꾸준히 다루어지지 않았나 싶다.


3. 통문화론과 문화접변론

『담배와 설탕의 쿠바적 대위법』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전체의 약 1/5 정도의 분량에 불과한데 언뜻 보면 마치 한 편의 에세이를 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가연지서』(Libro de buen amor)를 패러디하여 쿠바 역사를 “담배씨와 설탕부인의 싸움”(Pelea de don Tabaco y doña Azúcar)이라고 정의하며 서두를 열고 있으며, 때로는 돈후안, 돈키호테, 산초, 파우스트 등을 언급하기도 하는 등 문학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담배와 설탕에 대해서 특별히 주목한 이유는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담배와 설탕은 신대륙 발견의 산물, 즉 두 문화의 만남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오르티스가 적고 있듯이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1차 항해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면서 최초로 담배를 유럽에 소개했으며, 2차 항해 때는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를 신대륙에 전해주었다. 쿠바 문화가 두 문화의 만남으로 탄생한 새로운 문화라고 주장하는 오르티스로서는 담배와 설탕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가 남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적 상상력이 감미롭게 발휘되었다고는 하지만 1부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실증적인 비교분석이다. 제목에 어째서 ‘대위법’이라는 말이 들어갔는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이분법적 대비에 의존하고 있다. 코로닐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담배와 설탕은 다음과 같이 대비된다.



담배

토착적 
어두운 색
야생적
개성적
남성적
장인(匠人) 
계절적 시간
개인적 생산관계
자영농
중산층 형성
토착 자유주의를 대표
국가독립의 상징
세계 전체가 시장



설탕

외래적
밝은 색
문명적
일반적
여성적
대량생산
기계적 시간
협동적 생산관계
독점
계급갈등 유발
스페인 절대주의 옹호
외세개입
미국이 시장




위의 대비에 대해 오르티스가 어떻게 논지를 전개시키는지 간단하게나마 살펴보자. 우선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와 담배를 재배하는 데에는 어떤 인종이 노동력으로 투입되는가부터 차이가 났다. 사탕수수 재배는 주로 흑인 노예에 의해 이루어졌고 담배 재배는 주로 카나리아 제도에서 이주한 스페인인과 그 후손인 크리오요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탕수수 경작은 일시에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고 그 시기에 강도 높은 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며, 담배는 재배에서부터 생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단계에서 극도의 숙련도와 세심함이 요구되기 때문에 주인이 직접 챙겨야할 필요가 컸기 때문이다. 노예를 쓰고 안 쓰고의 차이로 인해 사탕수수 재배는 대농장(estancia) 단위로 이루어졌고, 담배 재배는 소농 내지 중농 단위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대농장주와 소농장주들 같은 스페인인 혹은 크리오요이면서도 정복 직후부터 필연적으로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가령 10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1차 독립전쟁(1868-1878) 기간 중에 식민시대의 기득권층인 대농장주들은 독립을 원하지 않았던 반면 상대적으로 기득권을 많이 누리지 못한 소농이나 중농 출신 중에서는 독립군 장군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대농장주들과 소농장주들의 갈등에는 지역 간 갈등도 작용했다.

사탕수수 재배는 서부에 위치한 수도 아바나와 그 인근 주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바나가 행정과 무역 그리고 본국과의 교통의 중심지이라 아무래도 대농장주들이 아바나를 중심으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반면 대농장주들에 비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약자였던 담배 재배자들은 중앙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오리엔테(Oriente)라 부르는 동부 지방에 주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지리적 분리가 고착화되어 중앙과 동부 지방의 지역 갈등이 심화되었다.

사탕수수와 담배는 각각 외세와 민족주의의 상징이기도 하다. 사탕수수 재배와 설탕 생산에는 대토지, 대규모 노동력, 기계화된 제당공장, 철도 등등 대규모 자본을 요하였기 때문에 크리오요 대지주들로서도 외국으로부터 자본을 도입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설탕 산업이 이윤이 많이 남는다는 인식이 퍼진 후에는 외국 자본의 진출이 활발해졌다. 게다가 쿠바 설탕의 주 수입국이 미국이었기 때문에 미국이 사실상 설탕 가격을 좌지우지했다. 반면 담배는 설탕과는 달리 비교적 외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수출시장이 다변화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소농장과 가내수공업 위주여서, 적어도 담배 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고 기계화되기 시작한 19세기 말 이전까지는 외국 자본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비교를 통해 오르티스는 “담배는 설탕보다 언제나 더 쿠바적이었다”(El tabaco ha sido siempre más cubano que el azúcar)라고 단언하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담배와 설탕의 이분법적 틀을 유지해 양자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오르티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그래서 1부를 마무리지면서 ‘담배씨와 설탕부인의 싸움’이 쿠바 사회에서 근본적인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오르티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담배와 설탕, 나아가 토착문화와 외래문화가 뚜렷이 대비되면서도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문화적 상호작용을 야기했다는 점을 밝히는 일이다. 이를 위해 오르티스가 도입한 개념이 바로 통문화화이다. 『담배와 설탕의 쿠바적 대위법』 2부에서 오르티스는 처음으로 통문화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이를 정의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2부는 거의 대부분의 지면을 담배와 설탕에 대한 개별적인 역사적․사회적․문화적 고찰을 하는데 할애할 뿐, 통문화화 현상에 대한 이론적 정립은 “통문화화라는 사회적 현상과 쿠바에서의 그 중요성에 대해서”(“Del fenómeno social de la transculturación y de su importancia en Cuba”)라는 제목의 2부 II장에 국한되어 있다. 2부 I장이 그저 차후 내용에 대한 간단한 언급과 소목차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II장은 실질적으로 2부의 서론이다. 이 II장이 바로 앙헬 라마를 필두로 많은 문화연구가들이 주로 인용하고 차용했으며 이론적 수정을 가한 대목이다. 그러나 II장 역시 아주 짧은 분량에 불과하기 때문에 『담배와 설탕의 쿠바적 대위법』를 통문화화 현상의 실증적인 연구서로 볼 수는 있어도 통문화론의 이론서로 보기는 힘들다.

어쨌든 2부 II장에 나타난 통문화론의 골자를 보면 쿠바의 문화는 이주자들이 자신의 뿌리가 되는 문화와 어느 정도 단절되는 경험을 하고, 이주지의 환경 속에서 문화를 습득하는 과정을 거쳐서 탄생한 새로운 문화이다. 오르티스는 각각의 단계를 탈문화화(desculturación), 신문화화(neoculturación), 통문화화라고 지칭했다. 문화 간 혼합을 논한다는 점에서 언뜻 보면 1920, 30년대부터 멕시코와 페루를 중심으로 유행한 혼혈(mestizaje) 이론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 너머’라는 뜻을 지닌 ‘trans-’라는 접두어를 쓰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오르티스가 스페인 정복 이전의 원주민 부족들 간의 통문화화 과정에 대해서도 언급하고는 있지만, ‘trans-’란 용어를 선택한 것은 정복 직후 토착문화가 사라지고 바다를 건너온 백인과 흑인 두 이주민 집단이 정착해서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킨 쿠바적 현실을 다분히 염두에 둔 것이다.

오르티스가 통문화화라는 신조어를 굳이 선택한 이유는, 193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인류학 학설의 하나인 문화접변(acculturation)론이 쿠바 문화의 특징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르티스에 따르면 문화접변은 ‘새로운 문화의 습득’만을 의미하기 때문에 문화 간 혼합의 필연적인 단계인 부분적 탈문화화(parcial desculturación)나 새로운 문화 현상이 창출되는 신문화화 단계는 포괄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사회과학에 커다란 영향을 준 문화접변론의 진정한 문제점은 오르티스의 지적처럼 단지 문화 변화를 설명하기에 너무 이론적 폭이 좁다는 점이 아니었다. 문화접변론은 ‘발전된’ 문화가 그렇지 못한 문화에 영향을 주어 변화시킨다는 서구우월주의적 전제를 깔고 있었다. 결국 ‘문화접변’은 문화의 변화를 뜻하기보다 문화의 상실을 의미하는 셈이었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의 거의 1세대 인류학자라 할 수 있는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 같은 이는 “나는 문화접변론자가 아닙니다”(No soy un aculturado)라고 말하며 문화접변론을 극복하는 것을 자신의 인류학 작업의 평생의 과제 중 하나로 삼았을 정도였다.

오르티스가 신조어를 썼다는 사실이나, 이를 바탕으로 확장된 개념을 선보였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외래적 요소와 토착적 요소의 본질적인 특징보다 두 요소 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발전된 문화’가 그렇지 않은 문화에게 영향을 주고 종국에는 후자가 사라지게 된다는 문화접변론의 주장은 설자리를 잃는다. 결국 오르티스는 문화접변론의 계서적 이항대립을 해체하고 있는 셈이다. 그 해체 전략의 일환으로 오르티스는 담배와 설탕의 이분법적 비교를 수행하면서도 토착적 요소와 외래적 요소가 뒤섞여왔다는 점을 끊임없이 시사한다. 가령 담배와 설탕을 각각 민족과 외세의 상징으로 규정하지만 콜럼버스로 인해 담배가 바다를 횡단해 유럽으로 건너가고 사탕수수가 쿠바로 건너왔다는 점을 이야기할 때, 오르티스는 민족과 외세의 영토적 경계가 이미 허물어졌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더욱이 영토적으로 뒤섞이는 이런 현상은 쿠바 역사에서 계속 진행되어온 일이었다. 예를 들어 외국인들은 쿠바에서 담배 종자를 구해 갔으며, 쿠바인들은 품질 좋은 사탕수수 품종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해왔으니 영토적으로 외세와 민족을 격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쿠바에서 토착 작물인 담배를 백인이 재배하고 외래 작물인 사탕수수 재배에 대규모 흑인 노예가 투입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때 토착적 요소와 외래적 요소의 인종적 경계도 무너진다. 담배를 남성의 상징으로 그리고 달콤한 설탕을 여성의 상징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젠더에 입각한 위계질서를 논하는 듯하지만, 담배 공장에는 프롤레타리아 여성 계층이 형성된 반면 사탕수수 재배에서 설탕 생산에 이르는 생산과정은 남성 노동력이 주로 투입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젠더의 경계도 무너뜨린다.

영토와 인종과 젠더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필연적으로 문화가 뒤섞여 새로운 문화가 생겨난다. 그 새로운 문화 역시 항구불변한 것은 아니다. 다른 문화와 접촉을 하고 다시 뒤섞여 또 다른 문화로 변화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다이키리라는 사탕수수 음료는 쿠바적 요소와 외래적 요소의 이항적 대비가 끊임없이 해체되면서 문화가 역동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쿠바에서는 예로부터 사탕수수주(酒)로 만든 그 칵테일 음료는 대중적이었다. “반 컵 정도의 사탕수수주 상당량, 설탕, 물 약간에 좋은 풀 몇 줄기와 레몬 한 조각을 곁들였다. 쿠바의 럼과 네덜란드의 진으로 대체될 무렵인 1800 몇 년까지 사람들은 드레이크를 마셨다.” [...] 레몬의 미덕을 이용한, 럼과 다이키리의 선조가 되는 그 음료는 쿠바 동부해안을 약탈한 저 대담하기 이를 데 없는 영국인 뱃사람 때문에 드레이크라고 불렀다. 드레이크(Francis Drake)는 스페인 역사에서는 ‘위대한 해적’으로, 영국인들의 역사에서는 ‘위대한 제독’으로 통한다. [...] 이후 그 음료는 다이키리로 대체되었다. 이 역시 사탕수수주 즉 럼과 레몬, 설탕으로 만들어졌다. 이 칵테일 음료는 1898년 산티아고 데쿠바(Santiago de Cuba) 작전이 펼쳐지는 동안 미국 해군과 군인들의 눈에 띄었다. 그들은 다이키리(Daiquirí)라는 이름으로 그 음료를 널리 퍼뜨렸다. 바로 그들이 상륙해서 그 음료를 마신 항구의 이름이었다.


일반적으로 쿠바의 고유한 음료문화로 인식되고 있는 다이키리가 사실은 이처럼 여러 나라의 재료가 뒤섞여 만들어졌으며, 기호의 변화나 재료의 변천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온 음료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음료문화의 탄생은 네덜란드의 서인도제도 진출, 드레이크나 미국 군인들의 침입 등등의 영토적 겹침에서 비롯되었다. 그 영토적 겹침의 기억은 너무나도 생생한 것이라 쿠바 음료문화를 대표하는 음료이면서도 영국 해적의 이름을 따 드레이크라고 부르거나 미국 군인들이 상륙한 지명을 따서 다이키리라고 불렀다. 이름부터가 쿠바의 대중적 음료라는 정체성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지만 오르티스는 이런 점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고정된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 이런 문화의 혼종이야말로 그가 주장하는 통문화화 현상 바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담배와 설탕의 쿠바적 대위법』이 쿠바 문화가 통문화화된 문화라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면, 오르티스의 또 하나의 명저인 『쿠바 민속에서의 흑인들의 춤과 연극』(Los bailes y el teatro de los negros en el folklore de Cuba, 1951)은 아프리카 문화가 쿠바 문화에 끼친 영향에 대해 논하고 있다. 아프리카 문화의 영향에 대해 연구했다고 해서 통문화론을 폐기한 것은 아니다. 단지 식민지배자가 차지하고 있던 권력을 독립 후에 상당부분 이양받은 크리오요 과두계층이 여전히 쳐놓고 있던 인종적․계급적․문화적 장벽을 넘어 아프리카 문화를 복원하는 것이 쿠바에서 진행된 통문화화 현상을 입증하기 위한 선결과제라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4. 통문화론과 탈식민주의

통문화론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르티스의 비판자들은 무엇보다도 통문화론이 문화 간 갈등보다 융합에 초점을 맞춘 혼혈(mestizaje) 이론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이는 지배문화에 말살될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는 피지배문화의 현실 혹은 지배문화에 대한 피지배문화의 저항 가능성 등을 간과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마르틴 라인하드가 이런 입장에서 오르티스를 비판한 대표적인 비평가이며, 이런 비판은 앙헬 라마의 통문화론에 대한 안토니오 코르네호 폴라르의 비판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심지어, 하위주체연구 혹은 호미 바바나 가르시아 칸클리니류의 혼종문화론에 대한 대안의 문화담론으로 통문화론을 수용하고 시도한 존 크라니어스커스(John Kraniauskas)조차도 통문화론 역시 부분적으로는 인종주의, 발전주의, 민족적 인민주의 등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오르티스에 대한 이런 비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1920, 30년대 라틴아메리카에 유행한 혼혈 이론이 국민통합이라는 시대적 당면과제가 낳은 문화 담론이었던 것처럼, 통문화론 역시 이와 유사한 현실, 즉 신생독립국가인 쿠바의 국가적 통합이라는 맥락에서 나온 문화 담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르티스의 통문화론과 『담배와 설탕의 쿠바적 대위법』은 현재성을 획득하고 있다. 가령, 하위주체, 증언서사, 탈식민주의 등의 관점에서 주목을 받은 『도망치 노예의 전기』(Biografía de un cimarrón, 1980)를 쓴 미겔 바르넷(Miguel Barnet)은 서구 문화에 대한 쿠바 문화의 ‘차이’를 주장하기 위해 오르티스의 통문화론을 이용하고 있다.- 이는 통문화론의 현재성이, 최근의 화두인 문화연구와 탈식민주의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에 관해 에드워드 사이드의 주장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이드는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직접적인 식민지배가 끝난 뒤에도 제국주의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정치적, 이념적, 경제적, 사회적 실천에서 여전히 과거의 식민지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르티스의 통문화론은 문화변용론을 통한 제국주의의 문화적 신탁통치를 극복하려는 탈식민주의 문화 담론인 것이다.

탈식민주의와의 관계망 속에서 통문화론을 고찰하면 오르티스의 작업은 확실히 선구적인 측면이 있다. 우선 통문화론은 앞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종, 영토, 젠더의 문제를 이미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탈식민주의 이론들의 관심사를 이미 투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통문화론은 탈식민주의의 기원으로 평가받고 있는 네그리튀드 운동보다 불과 몇 년 후에 제기된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네그리튀드 운동의 이론적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고 있다. 1934년 파리에서 일어난 네그리튀드 운동은 두 가지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전 세계 흑인들이 동질적이며, 식민지배 이전의 토착문화가 서구문화보다 더 우월하기 때문에 당연히 복원해야 한다는 전제이다. 이런 전제는 혼혈문화론을 주장한 루이스 알베르토 산체스(Luis Alberto Sánchez)나 코스모폴리티즘과 토착문화의 결합 가능성을 모색한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José Carlos Mariátegui)가 등장하기 이전의 안데스 인디헤니스모(indigenismo)에서도 나타나는 전제들이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첫째, 정체성을 고정된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문화 간 상호영향에 따른 역동적 문화 변천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본질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둘째, 서구문화와 토착문화의 관계를 역전시킴으로써 토착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서구중심주의의 계서적 이분법을 재생산하는 오류를 범한다. 1960년대에 이르러 네그리튀드 운동의 이러한 오류들은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오르티스의 통문화론은 탈문화화, 신문화화, 통문화화 같은 역동적인 문화변천 개념을 설정함으로써 네그리튀드 운동이 빠진 본질주의의 오류를 피해갔다. 또한 담배와 설탕의 끊임없는 이분법적 대비를 시도하면서도, 영토, 인종, 젠더 등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는 과정도 추적함으로써 계서적 이분법의 재생산을 경계했다. 통문화론이 네그리튀드 운동보다 더 현재성이 있는 탈식민주의 담론이며 선구적이라는 점은 비교적 최근 카리브 해 국가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논의가 되고 있는 크레올화(creolization)론이 유사한 주장을 한다는 점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크레올화론의 목표 중 하나는 바로 네그리튀드 운동의 본질주의와 계서적 이분법의 재생산을 극복하는 것이다. 또한 크레올화론은 문화의 뒤섞임 현상이야말로 카리브 해 문화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통문화론의 탈식민주의적 독해가 필요한 이유는 비단 그 선구자적 가치 때문만은 아니다. 통문화론의 존재는 영어권이나 불어권 탈식민주의 연구가들의 편견을 극복할 전거가 될 수 있다. 영어권과 불어권에서는 일반적으로 탈식민주의 연구가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태동하였다고 본다. 이는 영어권과 불어권의 식민지 대다수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립을 해서 식민주의에 대한 검토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바트 무어-길버트에 따르면 ‘탈식민’이라는 용어 자체도 1970년대 초반의 정치 이론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국가들에게서 독립한 국가들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되었다고 한다. 인도의 독립(1947)으로 촉발된 식민주의에 대한 검토가 제3세계론으로 발전하였고, 바로 이 제3세계론을 통해 라틴아메리카도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에 탈식민주의 논의에 있어서 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수많은 식민지의 독립이 중요한 기점이 된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통문화론의 존재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탈식민주의 논의의 기초가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리고 나아가 19세기 초에 독립한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오랜 신식민주의적 경험과 이에 대한 저항이 탈식민주의 연구를 풍요롭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2차 세계대전 이전으로 탈식민주의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일은 또한 최근 심화되고 있는 탈식민주의 논의의 이론적 편향성을 극복하는 단초를 마련해준다. 오늘날의 탈식민주의 논의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1978)을 발간한 이래 사이드, 바바, 스피박을 필두로 하여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탈식민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처럼 주로 프랑스의 해체주의나 탈구조주의 등 중심부에서 생성된 담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최근의 탈식민주의가 급진적이고 해방적인 형태의 문화적 실천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과 마찬가지로 서구 헤게모니의 강화에 공모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래서 사이드를 기점으로 탈식민주의 비평과 탈식민주의 이론을 나누고, 전자의 경우처럼 프란츠 파농을 위시해 제3세계적인 상황에 좀더 충실한 탈식민주의적 인식을 사이드 이후의 탈식민주의 이론과 대등한 위치로 격상시킨 바트 무어-길버트(Bart Moore-Gilbert)의 시도가 주목을 끄는 것이다. 소위 성삼위라고 불리는 사이드, 바바, 스피박 등이 탈식민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확립함으로써 탈식민주의 연구를 활성화시킨 공로를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통문화론의 존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탈식민주의는 ‘성삼위’의 이론 이전부터 있어왔기 때문에 이들의 탈식민주의 이론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식민경험이나 탈식민적 실천을 논하는 것은 또 다른 문화적 종속에 빠지는 일일 수도 있다.◇